여기에서 '도태남'이란 무엇인가 다시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사전적으로 도태란 "여럿 중에서 불필요하거나 부적당한 것을 줄여 없앰"이란 의미다. 여성과 짝을 이루는 데에 성공한 사람들은 '선택'되고, 그렇지 못한 자는 '도태'된다. 그렇다면 여성이라는 자원의 목적이 누군가에게 소유되는 것에 있다면, 남성이라는 주체의 가치는 누구를 소유하느냐에 달려 있는 셈이다.
이 논지에 따르면 반반한 얼굴에 현혹되지 않고,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참하고 순결한 여자를 소유할 수 있다면 남성으로서 성공한 인생이다.
사랑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을 것이다.
서로를 아끼고 귀히 여기는 것, 성적인 매력에 이끌리는 것, 타인의 프레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타인과 나를 함께 변화시키는 것에 이르기까지 층위도 다양하고 정의도 다양하다. 설거지론에 대해서 말하거나 불안해하는 남성들은 자신이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에는 추호도 의심이 없다. 심지어 지금껏 사랑받는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라 순전히 이용당한 것일까봐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
여자는 순결한 존재여야 한다.
순결하지 않은 여자가 '싫은' 것보다, 이들은 순결하지 않은 여자를 '두려워'한다. 다른 남자를 사랑한 적이 있다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 명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세계를 경험해본 여자가 본질적으로 '도태남'인 자신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 말을 유통하는 이들은 경험이 많은 여자에게 속지 않겠다며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해댄다.
설거지론의 핵심
이 '설거지'라는 단어는 현실과는 1도 상관이 없는 그 단어의 추상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와 관계 맺기에 철저하게 실패한 2021년의 젊은 남성을 몹시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프레임이다. 사랑받을 자신이 없는 이들이, 타인의 사랑을 못 믿어서 전형성을 갖가지로 끌어와서 서로를 두들겨 패는 광경이다.
전형성
전형성은 긴 경험으로 축적된 거라서 어떤 면에선 인사이트를 가지지만, 동시에 바뀐 세계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기도 한다. 전형성은 어떤 근거도 필요로 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의 직관에만 호소한다. 직관은 때로 현실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프레임이 안 깨지면 사랑은 어차피 불가능하다.
사랑은 구체적인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전형성이란 구체 앞에서는 산산조각이 날 수밖에 없다. 제각기 다른 사랑의 방식은 전형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코를 찡그리는 표정, 눈꺼풀의 깜빡이는 속도, 발을 떼는 방식 같은 것들처럼 반드시 구체는 전형을 부정한다. 전형성의 프레임을 깨지 않는 이상, 사랑이라는 단어에는 접근할 수가 없다. 물론 우리는 모두 개인의 프레임을 가지고 살아간다. 사랑의 본질은 그 프레임을 상대의 구체성으로 깨나가고 재구축하는 것이다. 개개인의 프레임이 합종연횡 하는 과정이다. 프레임이 안 깨지면 사랑은 어차피 불가능하다.
어떤 이들은 망가진 세상에서 망가진 방식으로 오래 살다가 프레임을 깨뜨리는 힘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퐁퐁단'을 뒤집어버린 친구 얘기를 듣고 웃다가, 어떤 사람들이 전형으로만 사랑을 호명할 수 있다면 프레임 속에서 고통을 감내하는 것도 어쩌면 사랑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상대로 인해서 밀려오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힘을 키우다 보면 프레임을 깰 힘이 생길지도 모르고.
원글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84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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