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had just finished my schooling and was looking for a job,
a friend put me in touch with an absurdly
well-connected British biographer who, she assured me,
would help me find the professional position of my dreams. I wrote and asked him whether we might meet,
explaining that I would appreciate his advice on securing literary work and enclosing some of my early efforts.
He duly invited me for tea. The advice I had in mind sounded like this:
“You must call so-and-so at this number and say I suggested it and
he will publish you and give you loads of money.” After giving me a cup of weak tea
— no sandwiches, no pastry, not even sugar or milk —
he said, “I have only one piece of advice for you. Have a vision and cleave to it.
” We then discussed the weather for twenty minutes.
내가 막 학교를 마치고 일자리를 찾고 있을 때, 한 친구가 터무니없이 연줄이 좋은 영국 전기작가를 만나게 해줬는데, 그는 나에게 내 꿈의 직업적인 위치를 찾는 것을 도와준다고 장담했다. 문학작품 확보와 초기 노력 중 일부를 동봉하는 것에 대한 그의 조언이 고맙다고 설명하면서 나는 그에게 우리가 만날 수 있는지 편지를 써서 물어보았다. 그는 정식으로 나를 차에 초대했다. 그의 충고는 마치 "이 번호로 이리저리 전화를 걸어 내가 제안했다고 하면 그가 당신을 출판하고 돈을 많이 줄 것"이라는 식으로 들렸다. 샌드위치, 페이스트리, 설탕, 우유도 없는 약한 차 한 잔을 나에게 준 후, 그는 말했다. "당신을 위한 조언은 딱 한 가지입니다. 비전을 가지고 그것에 충실하라." 그리고 나서 우리는 20분 동안 날씨에 대해 토론했다.
While I, unlike that biographer, am an artesian font of utilitarian suggestions,
I can now see that being asked to comment on young brilliance is an explicit invitation to pomposity.
I have done my best to R.S.V.P. in the negative.
The proximate, tacit call to romanticism is harder for me to resist. While all old people have been young,
no young
people have been old, and this troubling fact engenders the frustration of all parents and elders,
which is that while you can describe your experience you cannot confer it. It’s tempting, nonetheless,
to pose as an expert — and in another way it’s tempting to say, ‘I know nothing that you don’t already know.’ Neither of those postures is right.
Every stage of life longs for others. When one is young and eager, one aspires to maturity,
and everyone older would like nothing better than to be young. We have equal things to teach each other.
Life is most transfixing when you are awake to diversity, not only of ethnicity, ability, gender, belief, and sexuality
but also of age and experience. The worst mistake anyone can make is to perceive anyone else as lesser. The deeper you look into other souls —and writing is primarily an exercise in doing just that — the clearer people’s inherent dignity becomes. So I would like to be young again —
for the obvious dermatological advantages, and because I would like to recapture who
I was before the clutter of experience made me a bit more sagacious and exhausted.
What I’d really like, in fact, is to be young and middle-aged, and perhaps even very old, all at the same time
— and to be dark- and fair-skinned, deaf and hearing, gay and straight, male and female.
I can’t do that in life, but I can do it in writing, and so can you.
Never forget that the truest luxury is imagination, and that being a writer gives you the leeway to exploit all of the
imagination’s curious intricacies, to be what you were, what you are, what you will be, and what everyone else is or
was or will be, too.
나는 전기 작가와는 달리 공리주의적 제안의 예술적인 폰트이지만, 젊은 총명함에 대한 언급을 요구하는 것은 거만함에 대한 명백한 초대라는 것을 이제 알 수 있다. 나는 최선을 다해 R.S.V.P.를 부정적으로 봤다. 낭만주의에 대한 가까운, 암묵적인 요구는 내가 저항하기 더 어렵다. 모든 노인들이 젊었지만, 젊은이들은 늙지 않았고, 이 안타까운 사실은 모든 부모들과 어른들의 좌절감을 초래하는데, 그것은 당신이 당신의 경험을 묘사할 수 있지만 그것을 수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인 척 하는 것은 유혹적이다. 그리고 또 다른 방식으로, '나는 네가 이미 모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유혹적이다. 그 두 가지 자세 모두 옳지 않다. 인생의 모든 단계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지속된다. 젊고 열심일 때 성숙해지기를 열망하며, 나이 든 모든 사람은 젊음보다 더 나은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가르쳐야 할 동등한 것들이 있다. 인종, 능력, 성별, 신념, 성정체성뿐만 아니라 나이와 경험까지 다양성에 대해 깨어 있을 때 삶이 가장 많이 전달된다.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나쁜 실수는 다른 누군가를 덜하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다른 영혼을 더 깊이 들여다볼수록 - 그리고 글쓰기는 바로 그것을 하는 데 있어서 주로 연습입니다 - 사람들의 타고난 존엄성이 더 분명해진다. 그래서 나는 다시 젊어지고 싶다 – 분명한 피부과학적 이점을 위해서, 그리고 지저분한 경험이 저를 좀 더 현명하고 지치게 만들기 전의 제 모습을 되찾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정말 원하는 것은 젊고 중년이고, 어쩌면 아주 늙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둡고 하얀 피부, 귀머거리, 청력,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남녀노소입니다. 난 그렇게 할 수 없어 하지만 글로써는 할 수 있고 너도 할 수 있어 가장 진정한 사치는 상상력이며, 작가가 되는 것은 상상력의 모든 호기심 많은 복잡함을 이용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라.
I want to take a moment to talk about the middle of things.
The middle of things is less exciting than the beginning and less dramatic than the end. Middles can seem humdrum.
Say that your current relationship to writing has been like falling in love: we exalt falling in love as the finest of all possible experiences. But the reason people marry and
stay married is that the middle, when it can be made to work, far outclasses the beginning.
Ask people who have been happily married for a decade or two whether they would like to start all over again,
and you’ll find that they mostly wouldn’t, even if some are tempted by the occasional dalliance.
It gets to be that way with your writing, too, as you get an ever-clearer sense of what interests you,
what you can do, what you’d like to be able to do. Your mature work is the outcome of your early work:
that there can be no meaningful middle without a meaningful beginning. But the middle is as joyous as enduring love.
중간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고 싶다. 사물의 중간은 시작보다 덜 흥미진진하고 끝보다는 덜 드라마틱하다. 중간은 따분하게 보일 수 있다. 글쓰기와 현재의 관계가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 것을 가능한 모든 경험 중 가장 좋은 경험으로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결혼하고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이유는 일을 할 수 있을 때 중간이 시작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 지 10년이나 20년 된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지 물어보면, 비록 어떤 사람들은 가끔 하는 빈둥거림에 유혹을 받더라도, 대부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글쓰기에도 그렇게 됩니다. 무엇이 당신에게 흥미를 주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더 명확한 감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성숙한 작품은 의미 있는 시작 없이는 의미 있는 중간이 있을 수 없다는 당신의 초기 작업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중간은 사랑을 견디는 것만큼 즐겁다.
In thinking about this address, I returned to Rilke’s Letters to a Young Poet, the ultimate expression of
intergenerational literary wisdom.
If you’ve never read these letters, then do. They are worth reading while you are
young so that you can imagine yourself as the recipient of this brilliance;
they are worth reading when you are old as a measure of what your own acumen ought to approach.
One of Rilke’s injunctions is easy to follow:
“Read as little as possible of literary criticism.
” I’m going to pass that one along unmediated. But others warrant a closer reading. The most famous passage is this:
나는 이 연설에 대해 생각하다가 세대 간 문학 지혜의 궁극적인 표현인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로 돌아왔다. 이 편지들을 읽어본 적이 없다면 읽어보세요. 당신이 젊을 때 읽을 가치가 있어서 당신은 이 명석함의 수혜자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신의 통찰력이 접근해야 하는 것의 척도로서 당신이 늙었을 때 읽을 가치가 있다. 릴케의 명령 중 하나는 따르기가 쉽다: "문학적 비평을 가능한 적게 읽어라." 그건 그냥 넘길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더 자세히 읽을 수 있다. 가장 유명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Have patience with everything that remains unsolved in your heart. Try to love the questions themselves, like locked rooms, or books written in a foreign language. Do not now look for the answers. They cannot now be given to you, because you would not be able to live them. And the point is, to live everything. Live the questions now. Perhaps then, someday far in the future, you will gradually, without even noticing it, live your way into the answer.
당신의 마음속에 풀리지 않은 모든 것에 인내심을 가지세요. 잠긴 방이나 외국어로 쓰여진 책처럼 질문 자체를 사랑하도록 노력하세요. 이제 답을 찾지 마세요. 그들은 이제 당신에게 주어질 수 없으니까요. 왜냐하면 당신은 그것들을 살 수 없기 때문이에요. 요점은 모든 걸 사는 거야 지금 바로 질문을 살아보세요. 아마도 그러면, 먼 미래 언젠가, 당신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점차 당신의 방식으로 정답을 향해 살아갈 거에요.
The insight is tremendous, but he has it backwards.
Belief in answers can get you through your early days, while the belief in questions,
which is so much less tangible, takes a long time to arrive at.
To know more is simply a matter of industry; to accept what you will never know is trickier.
The belief that questions are precious whether or not they
have answers is the hallmark of a mature writer, not the naïve blessing of a beginner.
통찰력은 엄청나지만, 그는 거꾸로 알고 있다. 대답에 대한 믿음은 당신의 어린 시절을 헤쳐나갈 수 있는 반면, 훨씬 덜 가시적인 질문에 대한 믿음은 도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더 많이 아는 것은 단순히 산업의 문제이다. 결코 알지 못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답이 있든 없든 질문이 소중하다는 믿음은 성숙한 작가의 특징이지 초보자의 순진한 축복이 아니다.
Of writing itself, Rilke wrote: “Depict your sorrows and desires,
your passing thoughts and beliefs in some kind of be
auty — depict all that with heartfelt, quiet, humble sincerity; and use to
express yourself the things that surround
you, the images of your dreams and the objects of your memory.
If your daily life seems poor, do not blame it;
blame yourself, tell yourself that you are not poet enough
to call forth its riches; for to the creator there is no
poverty and no poor or unimportant place.” All writers know this problem.
A poor workman blames his tools, and we
have only two: language and experience.
Neither one is so poor as to hamper our ability to do what we dream of.
The use of language gets taught at M.F.A. programs nationwide.
The use of experience is far more elusive, a long-
term game not easily won. Experience poses the questions we are asked to live,
and our writing is the mere shadow of an answer.
글쓰기에 대해 릴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의 슬픔과 욕망, 지나가는 생각과 믿음을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에 담아라 - 진심 어린, 조용한, 겸손한 성실함으로 모든 것을 묘사하라; 그리고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 꿈의 이미지와 기억의 대상들을 당신 자신을 표현하는 데 사용하라. 만일 여러분의 일상이 가난해 보이면, 그것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 자책하십시오. 여러분은 그 부를 부를 만큼 시인이 아닙니다. 창조주에게는 가난이 없고 가난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곳이 없다.' 이 문제는 모든 작가들이 알고 있다. 가난한 일꾼은 도구를 탓하고, 우리는 언어와 경험 두 가지밖에 없다. 어느 쪽도 우리가 꿈꾸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방해할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다. 언어 사용은 전국의 M.F.A. 프로그램에서 배운다. 경험 활용이 훨씬 더 어려운데, 장기전은 쉽게 이길 수 없다. 경험은 우리가 살아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우리의 글은 해답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Rilke adds, “Things aren’t all so tangible and sayable as
people would usually have us believe; most experiences are
unsayable, they happen in a space that no word has ever entered,
and more unsayable than all other things are
works of art, those mysterious existences, whose life endures
beside our own small, transitory life.” That’s not far off
base, but, of course, the writer’s job is to say those things
that appear unsayable, to cloak with language those
volatile experiences that seem barely able to endure it.
릴케는 "모든 것이 보통 사람들이 믿게 하는 것처럼 그렇게 유형적이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험은 말할 수 없고, 어떤 말도 들어오지 않은 공간에서 일어나며, 다른 모든 것보다 더 말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작고 일시적인 삶을 지탱하는 신비로운 존재인 예술 작품이다."라고 덧붙인다. 그것이 크게 어긋난 것은 아니지만, 당연히 말할 수 없어 보이는 그런 것들을 말하고, 간신히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변덕스러운 경험들을 언어로 가리는 것이 작가의 일이다.
Rilke has written, “Search for the cause, find the impetus
that bids you write. Put it to this test: Does it stretch out
its roots in the deepest place of your heart? Can you avow
that you would die if you were forbidden to write? Above
all, in the most silent hour of your night, ask yourself this:
Must I write? Dig deep into yourself for a true answer.
And if it should ring its assent, if you can confidently
meet this serious question with a simple, ‘I must,’ then build your
life upon it.” That rhetoric of urgency is the credo of most writers:
we may be on this path for profit, for fame, for
catharsis — but, more fundamentally,
we are there because it seems the only possibility.
릴케는 "원인을 찾고, 입찰에 대한 자극을 찾아라. 이 테스트를 해보십시오. 그것은 당신의 심장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립니까? 글을 쓰는 것이 금지되었다면 죽을 것이라고 맹세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밤이 가장 조용할 때,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세요. 써야 하나요? 진실한 답을 얻기 위해 자신을 깊이 파헤쳐라. 그리고 만약 그것이 동의한다면, 만약 여러분이 이 심각한 질문에 대해 "나는 해야만 한다"라는 간단한 말로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면, 그 위에 여러분의 삶을 구축하세요." 그 긴급한 수사학은 대부분의 작가들의 신조이다: 우리는 이윤, 명성, 카타르시스를 위해 이 길을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거기에 있는 이유는 그것이 유일한 가능성인 것 같기 때문이다.
Rilke goes on, “It is clear that we must trust what is difficult;
everything alive trusts in it, everything in Nature grows
and defends itself any way it can and is spontaneously itself,
tries to be itself at all costs and against all opposition.
We know little, but that we must trust in what is difficult is
a certainty that will never abandon us; it is good to be so
litary, for solitude is difficult; that something is difficult must
be one more reason for us to do it.” The Romantic
sublime entails the exchange of easier for more difficult pleasures.
This is an attractive bargain only when more
difficult pleasures are more propitious than less difficult ones.
What Rilke is suggesting is not simply that we give up
easier pleasures because the best things in life happen to be difficult,
but rather that the difficulty itself is what
makes those efforts so rewarding — that we need not merely endure
difficulty to get to a goal, but must
understand difficulty as part of the goal. That sounds masochistic,
but it is masochistic only insofar as the act of
writing is masochistic: insofar as the burdensome activity of
marrying words to experience is a source of pain as well
as pleasure.
릴케는 "우리가 어려운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그 안에서 신뢰하고, 자연의 모든 것은 스스로 성장할 수 있고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방어하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고 모든 반대에도 스스로가 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어려운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는 확실함이다. 고독은 어렵기 때문에, 고독은 좋은 것이다. 어려운 것이 우리가 그것을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 낭만적 숭고함은 더 쉬운 쾌락과 더 어려운 쾌락을 교환한다. 이것은 더 어려운 쾌락이 덜 어려운 것보다 더 명분 있을 때에만 매력적인 거래이다. 릴케가 제안하는 것은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들이 어렵기 때문에 더 쉬운 쾌락을 포기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려움 자체가 그러한 노력을 보람 있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단순히 어려움을 견뎌야 할 뿐만 아니라 목표의 일부로서 어려움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마조히즘적으로 들리지만, 글을 쓰는 행위가 마조히즘적인 경우에만 마조히즘이다: 말과 경험을 결합시키는 부담스러운 활동이 기쁨뿐만 아니라 고통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To be an artist means: not to calculate and count; to grow and ripen like a tree which does not hurry the flow of its sap and stands at ease in the spring gales without fearing that no summer may follow. It will come. But it comes only to those who are patient, who are simply there in their vast, quiet tranquility, as if eternity lay before them.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계산하고 세지 않는 것, 수액의 흐름을 재촉하지 않고 여름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없이 봄 갈레에서 편안하게 서 있는 나무처럼 자라고 익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인내심 있는 사람들, 마치 영원이 그들 앞에 놓여있는 것처럼 그들의 거대하고 조용한 평온함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온다.
This is what I will say to you most urgently: there are many obvious differences
between middle age and youth,
between having lived more and done more and being newly energized
and fresh to the race. But the greatest
difference is patience. Youth is notoriously impatient,
even though there is no need for impatience early on, when
people have the time to be patient. In middle age, the wisdom of
patience seems more straightforward, but there
aren’t so many days left. But Rilke is correct that we must all
write as though eternity lay before us. Enjoy the
flexibility that span of eternity offers.
The discourse between the young and the nostalgic retains some of its
inherent poetry in the form of a longing intimacy.
The freshness of younger people awakens memories in older
ones — because though you, young writers, are yourselves
at the brink of your own future, you evoke the past for
those who came before you.
제가 여러분께 가장 시급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중년과 청년 사이에는 더 많이 살고 더 많이 한 것과 새롭게 활력을 얻고 경주에 신선해진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인내심이다. 젊음은 인내할 시간이 있으면 일찍부터 조급해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악명높게 조급해 한다. 중년이 되면 인내의 지혜가 더 직설적으로 느껴지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영원이 우리 앞에 있는 것처럼 써야 한다는 릴케의 말이 맞아. 영원이 주는 유연성을 즐겨라. 젊은이들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사람들 사이의 담론은 갈망하는 친밀감의 형태로 고유의 시의 일부를 간직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의 신선함은 나이 든 사람들의 기억을 깨운다. 왜냐하면 젊은 작가인 여러분은 자신의 미래 앞에 서 있지만, 여러분보다 먼저 온 사람들에게는 과거를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원글
http://andrewsolomon.com/articles/the-middle-of-things/
Word to me
utili · tar · ian : 실용적인, 공리주의의
ex · pli · cit : 명쾌한, 솔직한, 노골적인
pom · pos · i · ty : 화려, 거드름 피움, 거만한, 호언장담
prox · im · ate : (시간 순서 등이) 가장 가까운
tacit : 암묵적인
en · gen · der : (어떤 감정 상황을) 낳다. 불러일으키다.
as · pire : 열망하다.
per · ceive : 감지하다. 인지하다.
derma · tol · ogy : 피부과학
sa · ga · cious : 현명한
lee · way : (무엇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거나 변할 수 있는) 자유[재량]
in · tri · cacy : 복잡한 사항
hum · drum : 단조로운, 따분한
out · class : 경쟁 상대를 압도하다(훨씬 능가하다)
dal · li · ance : 시간 낭비(에 불과한 일)
re · cipi · ent : (어떤 것을) 수령인
acu · men : (일에 대한) 감각
tan · gible : 분명히 실재하는, 유형의, 감지할 수 있는
de · pict : (그림으로)그리다, (말이나 그림으로) 묘사하다.
ham · per : 방해하다. (특히 음식을 운반하는 데 쓰는 뚜껑이 달린)바구니
mere [US- mɪr ] [UK-mɪə(r)] : 겨우...의. 단지...만의(무엇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뚜렷한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하다는 뜻을 나태낼 때 씀), 작은 호수
tran · si · tory : 덧없는
vola · tile : 변덕스러운, 휘발성의
im · petus : (일의 추진에 필요한)자극제, 추동력
bid : 값을 매기다. 얻으려고 노력하다.
avow : 맹세하다.
as · sent : 찬성, 찬성하다.
rhet · oric : 미사여구
sub · lime : (감탄할 만큼) 절묘한,숭고한, 황당한, 극단적인
pro · pi · tious : (일을 하기에) 좋은, 유리한
in · so · far : ~하는 한에 있어서는
bur · den · some : 부담스러운, 힘든
sap : 수액
gale : 강풍, 돌풍
tran·quil·(l)i·ty : 평온, 차분한, 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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