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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 Security/Column

[Colum]패배자가 되지 않으려거든 ‘대성당’을 가슴에 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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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택쥐베리 <중앙일보>

“완공된 성당의 관리자로, 혹은 성당 의자나 운반하는 사람으로 자기 소임을 다했다고 만족하는 사람은 이미 그 순간부터 패배자다. 지어나갈 성당을 가슴 속에 품은 이는 이미 승리자다. 사랑이 승리를 낳는다…. 지능은 사랑을 위해 봉사할 때에야 비로소 그 가치가 빛난다.” -생텍쥐페리 ‘전시 조종사' 중.

 

패배자의 정의

생텍쥐페리는 저 글에서 먼저 누가 패배자인지를 정의한다. 남들이 성당을 완성하기 기다린 뒤, 관리나 하려 드는 이야말로 패배자다. 의자를 들고 앉을 자리나 확보하려 드는 이야말로 패배자다. 인생에서 아무런 위험도 감수하지 않은 자가 패배자다. 무엇인가 걸었다가 실패한 사람은 패배자가 아니다. 아무것도 걸지 않은 자가 패배자다. 무임승차자가 패배자다. 결과적으로 아무리 많은 이익을 계산해 얻었어도, 무임승차자는 패배자다.

 

 

 

답해라

성당 안에서 거저 앉을 자리를 얻었는데 왜 패배자인가? 힘들이지 않고 이익을 얻었는데 왜 패배했다고 하는가? 이익을 계산하거나 추구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익의 최대화는 삶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패배한 것이다. 이익을 추구하라. 그러나 답하라.

 

생텍쥐페리에 따르면,

오직 ‘사랑’만이 삶의 목적이라는 어려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이익을 계산하는 지능은 그 사랑에 봉사할 때 비로소 진정한 가치가 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무엇이고,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인간이 알 수 있을 리야. 사랑은 이익의 계산을 넘어선 곳에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인간은 모른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향한 통로다. 그것이 바로 대성당이다. 그 통로를 대성당이라고 불러도 좋고, 사원이라고 불러도 좋고, 절이라고 불러도 좋고, 성소라고 불러도 좋다. 혹은 ‘가람’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unsplash

 

어떻게 대성당을 그리는가

어떻게 하면 가슴속 대성당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가? 미국의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1938~1988)는 소설 ‘대성당’에서 말한다. 대성당을 그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맹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은 대성당을 그리지 못한다고. ‘대성당’에서 맹인은 자신을 환대하지 않던 눈뜬 이에게 묻는다. 눈을 뜨면 삶의 수단이 보일지 몰라도 삶의 목적은 보이지 않는다. 삶의 목적을 보기 위해서는 묵상해야 하고, 묵상할 때는 눈을 감는다.

 

unsplash

 

 

출처

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1/03/06/MVSSMJARRVDYHJASIFMON46R7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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