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다 보면 전반적으로 몽환적인 느낌이 난다. 알 것 같으면서 모르는 기분.
때론 이해가 아주 잘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때론 너무 어려워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노스텔지어 = 그리스어로, Nostos(고향) + alg(고통) 두 가지 의미가 합쳐진 합성어.
리스본
1)
나는 또 다른 인생을 부여주는 책들을 좋아했어. 내가 읽은 책들은 다 그런 거야. 전부 진짜 인생을 다루지만, 접어 뒀던 부분을 다시 찾아 읽어도 그 건 나에게 일어났던 인생은 아니었지.
책을 읽을 때면 모든 시간 감각을 상실했엉. 여자들은 항상 다른 삶을 궁금해 하는데, 대부분의 남자들은 지나치게 야심이 큰 나머지 이걸 이해 못해. 다른 삶, 전에 살았던 삶, 살 수도 있었던 삶, 그리고 난 너의 책이, 또 다른 삶을 사는게 아니라 상상만 하고 싶은 삶, 말없이 나나 혼자 상상해 보고 싶은 그런 삶에 대한 것이길 바랬어.
그러니가 읽지 않으편이 더 나았지. 서점의 유리창을 통해 네 책들을 볼 수 있었단다. 내겐 그걸로 충분했어.
요즘은 헛소리를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아요.
네가 찾아낸 것만을 쓰렴.
제가 뭘 찾아낸 건지 전 끝끝내 모를 거에요.
그래. 끝내 모를 거야. 다만 네가 서짓말을 하는지, 아니면 진실을 말하려고 노력하는지, 그것만큼은 알아야 해. 더 이상은 그걸 혼동하는 실수를 용합할 여지가 없으니까.
2)
인생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선을 긋는 문제이고, 선을 어디에 그을 건지는 각자가 정해야 해. 다른 사람의 선을 대신 그어줄 수 없어. 다른 사람이 저해놓은 규칙을 지키는 것과삶을 존중하는 건 같지 않아. 그래서 삶을 존중하려면 선을 그어야 해.
3)
그러니까 모든 게 죽음으로부터 시작됐다는 말씀이세요?
바로 그거야. 그리고 탄생이 뒤를 따랐어.
탄생이 일어난 건 - 그게 탄생이 있는 이유인데- 더도 덜도 아닌 처음에,
그러니까 죽음이 있는 후에 손상 된 것들을 고칠 기회를 제공받았기 때문이야.
그게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란다, 존.
고치려고
쿠라쿠프
1)
책을 돌려줄 때면 그 와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가 긴 인생을 살아오며 읽은 것을 그만큼 나도 더 알게 됐기 대문이었다. 책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었다.
아일링턴
1)
그냥 나눠 주는 거라니까.
이렇게나 많이? 수백 개는 되겠는걸!
'무성'이라는 조직이 있는데 거기서 양로원, 고아원, 무주택자 수용소, 임시 수용소 같은 곳의 가낭한 사람들에게 씨앗을 나눠 주거든. 으레 아무엇도 없이 삭막한 그런 곳에 꽃을 피우자는 취지야. 물론 그런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어떤 의미는 있겠지. 그리고 내겐 정원의 즐거움을 사람들과 나누는 방법이 되고. 자기만족이야.
퐁다르크 다리
1)
유목민에게 과거와 미래라는 개념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의 경험에 종속된다. 지나가 버린 것, 또는 기다리는 것은 어딘가 다른 곳에 숨겨져 있다.
사냥을 하는 쪽이든 사냥을 당하는 쪽이든 생존의 전제조건은 잘 숨는 것이다. 목숨은 은신처를 찾아내는 데 달렸다. 모든 것이 숨는다. 사라진 것은 숨어 버린다. 빈자리 - 죽은 이의 부재처럼 - 는 버림받는 느낌이 아닌 상실의 느낌을 안겨 준다. 죽는 이는 어딘가 다른 곳에 숨어 있다.
슘과 칭
1)
스타일? 어떤 가벼움. 어떤 행동이나 반응을 배제시키는 부끄러움. 어떤 우아한 제안.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떤 멜로디를 개대 할 수 있으며, 때로는 찾을 수도 있으리라는 가정. 하지만 스타일은 희방하다. 그것은 안에서부터 나온다. 그것은 찾아 나선다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스타일과 패션이 깥은 꿈을 공유할 수 있어도, 그 둘은 서로 다르게 장조된다. 스타일은 보이지 않는 약속이다. 그것이 인고의 기질과 세월을 대하는 무던한 자세를 요구하고 키우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스타일을 음악과 매우 흡사하다.
다른 사람의 피드백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느지 알아볼려고 검색을 해보았다가 그래도 가장 이야기가 형상을 가지고 있어서 가져와 봤다.
보이지 않는 걸음
존 버거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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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은 세상을 떠난 이와의 대화로 이뤄진 책이다. 존은 유럽 곳곳의 도시를 다니면서 돌아가신 어머니, 옛 스승, 친구들을 만난다. 그들은 이미 망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승의 일부, 즉 산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나타나서는 말을 건네고 돌연히 사라져 버린다. 어느 날 리스본 거리에서 어머니를 만난 존은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뭘 쓰더라도 그게 뭔지를 당장에 아는 건 아니야. 늘 그랬어. 다만 네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니면 진실을 말하려고 노력하는지, 그것만큼은 알아야 해.” 그건 존의 글쓰기를 말하는 것인지 인생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무엇이 됐든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결국 인간의 마지막엔, 얼마만큼 진심으로 살았는가 하는 질문만이 남을 테니까. 인간의 죽음은 많은 것을 남긴다. 또 다른 죽음이 될 수도 있고 희망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 그렇게 세상은 죽음과 탄생으로 유기되고 순환된다. 한 사람의 삶은 결코 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망자를 그리워하고 불러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이미 사라진 것들에 대한 애환은 인력人力으로 막을 수 없지 않을까. 아예 잊어버리면 모를까, 인간은 평생에 걸쳐 존재의 부재를 곱씹으며 울고 웃기를 반복한다. 잘은 모르지만 종교의 탄생도 인간의 외로움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았을까 한다. 나는 그런 이유로 종교를 믿지 않아도 종교적 행위가 이뤄지는 장소는 믿는다. 성당의 기다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맞잡은 채 기도하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삶이 정화되는 기분이 든다. 나는 그런 애수를 좋아한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향수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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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이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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